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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유명한 작곡가 -정율성
2009-11-17 14:46

                                                               

정율성, 중국의 유명한 작곡가. 1914년에 조선 전라남도 광주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정부은, 후에 음악을 몹시 사랑하여 이름은 율성으로 고쳤다. 1933년 봄, 정율성과 조선애국청년무리가 중국으로 건너와 조선재화항일단체에서 만든 남경(南京) “조선혁명간부학교”에 들어가 공부를 하였다. 졸업한 이후 남경과 상해등 지역에서 항일구국활동을 하였다.

중국항일전쟁이 발발한 이후, 정율성은 가슴에 열정을 품고, 1937년 10월에 서둘러 연안(延安)으로 가서 계속하여 섬북공학(陝北公學), 노신(魯迅)예술대학 음악과에서 공부를 하였다. 1938년에 중국인민항일군정대학(中國人民抗日軍政大學) 음악 지도자, 노신(魯迅)음악대학 성악교사로 위임되었으며, 1939년1월 중국인민항일군정대학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42년5월, 정율성은 연안문예업무 좌담회에 참가하였다. 1942년8월, 정율성은 태행산(太行山) 팔로군(八路軍) 총사령부 업무에 파견되어, 화북(華北)지역 “조선혁명군정학교” 교육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944년1월 연안으로 돌아왔다.

1938년4월, 그가 작곡한 가곡 <연안송(延安頌)>은 발표되자마자 연안지역부터 빠르게 전국으로 두루 퍼져나갔고, 많은 청년들이 서둘러 연안 혁명에 헌신하도록 북돋았다. 1939년 가을, 그와 공목아 합작으로 <팔로군대합창> 가사 작곡 창작을 완성하였으며, 그 중에서 <팔로군진행곡>과 <팔로군 군가>는 널리 유행되어 불러지는 인민군대군가로 되었다. 해방전쟁시기, <팔로군진행곡>은 <중국인민해방군진행곡>으로 이름을 고치고 가사를 간략하게 고쳤다.

항일전쟁 승리 후, 정율성은 조선으로 돌아와 일을 하며, 조선노동당 황해도위원회 홍보부장관과 조선인민국동호회 회장, 조선인민군협주단 단장, 조선국립 음악대학 작곡부 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이 기간에, 그는 조선인민투쟁과 중조우의을 찬미하는 <조선인민군진행곡>, <중조우의>등 많은 작품들을 작곡하였다. 1950년 중국으로 돌아가 중국국적을 취득하고, 북경(北京)에서 거주하며, 연이어 북경인민예술극원과 중앙가무단에서 음악업무를 하였다.

정율성의 일생 동안 총 360여 곡의 다른 형식, 장르의 사람들 사이에 널리 회자가 된 음악작품을 창작하였다. 그 중 <중국인민해방군진행곡>은 소리가 힘있게 울리는 리듬과 장엄하고 엄숙하며 씩씩한 곡조, 순수하고 간결한 언어로써 인민군대의 형상을 깊이 묘사하였고, 인민군대의 용왕매진한 전투기질과 위력이 대단한 기세를 표현하였으며, 중국인민해방군의 전투력과 정치업무의 하나의 구성부분이 되었고,

1988년7월25일 중국공산당중앙군사위원회에 <중국인민해방군군가>로 정식으로 확정되었다.

1976년 12월7일, 정율성은 북경에서 세상을 떠났다.

정율성님의 부인 정설송(丁雪松)은 신중국의 첫 여대사가 되었으며 딸은 정소제(鄭小提)는 현재 북경바로크실내(北京巴羅克室內)합창단단장이다.

주요작품:

가곡<연안송>,<연수요(延水謠)>,<팔로군군가>,<팔로군진행곡(후에<중국인민해방군진행곡>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중국인민해방군군가로 확정되었다.)> ,<흥안령조가(興安嶺組歌)>, <중국인민지원군진행곡>, 모택동의 시사에 곡을 붙여 노래한 <십육자령삼수(十六字令三首)>, <루산관(婁山關》)>, 가극 <망부운(望夫雲)> 및 어린이 가곡 <우리는 행복해요>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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